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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여행/오스트리아 (2009)

4. 한번은 가 보고 싶던 예술가들의 묘지(오스트리아)

by 마이욜 2009. 10. 6.

 예술가들의 묘지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제법 센 빗발이 창을 두드렸는데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즈음엔  어느 정도 그쳐 괜찮은 분위기의 묘지 구경을 하게 되었다.

 

 

 

                              

 

  빈에는 시내와 외곽을 통틀어 약 50여 곳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묘지가 시내 중심가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내외에 위치한 빈 11구의 ‘젠트랄프리드호프(Zentraltriedhof)’이며 1874년 시의회에서 조성하였다. 약 90만 평의 아파트먼트 형으로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상페테르부르크 공동묘지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매년 200만 명의 순례자들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이 시립묘지가 오늘날처럼 유명하게 되기까지는 빈 시의회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조성되었다.

건립 초창기에는 이렇다할 특색이 없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공동묘지에 다름 아니었다. 이 공동묘지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1881년에 발표한 ‘유명인들의 젠트랄프리드호프 명예묘지 이장 추진 법’이었다. 빈 시(市)의 주도로 각처에 흩어져 있는 예술인들의 묘지를 이장, 통합키로 하여 1881년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필두로 음악가, 학자, 정치인, 건축가 등과 역대 대통령들의 무덤을 한자리에 모았다.

 

 

 

 

 

  빈 시민들은 유명인사들의 무덤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장례식에도 참가하는 등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 자신도 죽은 후에 좋아하던 예술인들과 함께 묻히고자 묘지 구입이 쇄도하였고, 중앙묘지는 늘어나는 주문으로 몇 번에 걸쳐 묘역을 확장하고 또 확장하여야 했다. 현재는 빈 시민들의 무덤까지 통합 5개의 공동묘지까지 추가되어 무덤만 약 33만기에 달한다

 

 

 

  가난에 시달리며 외로운 죽음을 맞았던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루지 못했고 무덤조차 돌보는 이 없이 잊혀졌다. 원래의 무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그를 기리는 기념비. 빈 묘 위의 조각상은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모습이다.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는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죽었다. 생전에 베토벤을 몹시 존경하였다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관을 운구할 때도 직접 도울 정도였다. 그의 유언은 베토벤의 곁에 묻히기를 소망하였고 뜻대로 되었다.

 
 

 

 

 

서양 음악사에 가장 위대한 천재로 ‘음악의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은 빈에 35년간 살았다. 귓병으로 무척 신경질적이었던 그는 이웃과 마찰이 잦았으나 그가 사망했을 당시 비엔나의 모든 시민들이 비통해 하며 장례식장엔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독일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친분이 있었던 요한 슈트라우스의 추천을 통해 빈으로 옮겨 음악활동을 하였던 브람스. 당시 빈은 음악가들에게 좋은 조건을 많이 제시하였고 브람스도 남은 여생을 빈에서 음악활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무덤의 고뇌하는 조각상을 보면 운명도 그의 창작에의 열정을 꺾을 수 없음을 표현한 것 같다.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 전쟁 당시 의기소침하던 시민들을 위해 흥겨운 왈츠를 작곡하였고 그 인기는 빈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춤곡이 되었다. 그의 일생의 역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역시 세계적인 명곡이다. 그의 장례 당시에는 빈 인구의 3분의 1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사랑하던 아내와 함께 영원한 동반을 하며 잠들어 있다.

 

 

 

묘비 조각들은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해 사실적 기교의 섬세함, 현대미의 추상조각 등으로 다양하게 형상화 되어 있었다.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묘비들도 많아 조각공원에 들린 기분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대리석을 밀가루 주무르듯 자유자재이다. 얼마나 섬세하게 깎아놓았는지 묘비들만 종일 구경하여도 질리지가 않는다. 특히, 단순한 묘비명이 아니라 고인들의 과거와 장기(長技)를 회상할 수 있는 사실적인 묘비 조형물들에 눈이 자주 갔다. 바이올린 연주와 사냥에 뛰어났던 할아버지, 뜨개질을 잘 했던 할머니 등등 후손들은 그렇게 망자의 상징적인 대표 이미지를 조각해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참고: 윤혜영/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