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살이 다섯 해 째에, 강진 읍내의 비좁은 주막집에서 다산은 읍내 뒷산에 있는
고성사(高聲寺)라는 절로 옮겨 넉넉한 방을 차지하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승이던 혜장(惠藏)선사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때마침 고향에 두고 왔던 큰 아들 학가(學稼 : 뒷날 學淵)가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5년 만에 만나는 아들을 데리고 글을 가르치면서 절에서 지내는데,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을 맞았습니다.
내일이면 올 한해도 다 가는 섣달 그믐날
늙어지자 명절에도 무덤덤
슬플 것도 기쁠 것도 모두 없더라.
유유히 흐르는 세월 속에
그 하루가 우연히도
첫날이지.
홀로 앉아 그믐밤 보내는 일
오래 전 신유(1801)년부터 그러했네.
호호탕탕 넉넉한 마음으로
세속의
유혹에도 끌리지 않았네.
금년에는 너까지 또 와있으니
복록이 이렇게도 후하구나.
어찌타 근심 걱정 일으켜서
별안간
흙먼지 뒤집어쓴 듯이 할 것이냐.
……
네 아내와 네 누이동생도
필연코 너의 어머니 모시고서
올망졸망 등불 아래
앉아
머나먼 남쪽 하늘 생각하리라.
……
老覺歲時輕 戚歡兩無有 袞袞流年中 一日偶無首
兀兀送除夜 邈焉自辛酉 浩蕩心界寬 不被謠俗誘
今年汝又在 福祿如此厚 胡爲起憂端 忽若蒙塵垢
……
汝妻汝弟妹 正亦侍汝母 小小燈下坐
渺渺憶南斗…
「학가를 데리고 보은산방(고성사)에 있는데 마침 섣달그믐이어서 마음이 서글퍼져서
그냥 특별한 생각 없이 이렇게 읊어서 아이에게 보여주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우리네 아낙들은 섣달 그믐이면 차례상이며 가족들 먹을 음식 준비에 바쁜 날입니다.
명절에도 무덤덤해지는 나이...
어느 새 세월은 우릴 그런 나이로 만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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