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 브론즈, 155x100cm,
마이욜박물관,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로 제작된 작품이다.
강, 브론즈,
1943년
아리스티드 마이욜에게 있어서의 오귀스트 르네 로댕의 존재는 거대한 산과 같이
분위기를 위압하고 있으며 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인
앙트완 부르델이나 아리스티드 마이욜 등에게 타오르는 용암처럼 고뇌에 찬
인간의
모습을 한 거인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나는 기쁨에 넘치고, 찬연하게 풍요로운 사물들을 빛나는 빛 속에서 창조해
나가고
싶다."라고 말한 아리스티드 마이욜 그 자신도 거목으로서의 스승인 로댕에 대해서는
커다란 나무에 가린 숲풀이었다.
노르망디를 원천으로 한 오귀스트 르네 로댕의 예술정신이 항상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역동하는 고딕의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다면 스페인 국경과
따스한 지중해성의 온난한 기온이 감도는 남프랑스의 항구도시인
바뉠루스(Banyuls-sur-Mer)의 정서를 머금은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작풍은
그 옛날 그리스의 영광에의 복귀와 함께 고대 유럽문명의 조화미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클래시시즘은 그리스 고전기
이전의 보다 프리미티브한 세계,
그것도 단순하고 소박한 조형성 속에서 불가사의하게 생명력을 내재하고있는
코레의 세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를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 제작을 의뢰받는 자리에서
클레망소와 미르보가 포함된 건립위원회가 어떤 형태로 조각할 계획이냐고 묻자,
마이욜은 "아, 누드 여인이지요."라고 답했다.
마이욜하면 누드 여인상이 떠오를 만큼 평생을 두고 누드 여인상만을 전문으로
조각한 조각가이다.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중해에 면한 프랑스 남부의
해안 도시 바뉠루스(Banyuls-sur-Mer)에서 부친 라파엘 마이욜(Raphael Maillol)과
모친 카트린 로즈(Carthrine Rouge)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태어난 바뉠루스의 목가적 풍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된 인생을
살았는데 그의 부친은 포도밭 농사 때문에 항상 집에 붙어 있는 날이 별로 없었고,
주로 백모와 조부 밑에서 외롭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지중해를 바라 보면서 바다를 소재를 그렸으며, 근처 페루피냥미술관에
자주 방문하여 작가들의 그림을 모작하는 등의 화가로서 소질을 갈고 닦았으며,
그의 나이 10살 무렵인 1871년에 목(木)조각가로 가계를 도와오던 형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아버지의 포도밭 농사까지 흉년이 들면서 그의 가계는 점차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고향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자 마이욜은 1881년 자신이 평소
좋아했던 그림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 완고한 백모를 설득하여 매달 20프랑씩
학비를 보내 주기를 약속 받고는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나왔다.
파리 생활의 힘겨움이 익숙해져 갈 무렵인1882년, 그는 당시에 유명했던 조각가
장 레옹 제롬(Gerome)의 추천으로 <에콜 데 보자르>의 고대 양식 데셍부에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 - 1889)의 전문적인
지도를 받아 누드 데생 강의를 받았다.
1883년에는 응용미술학교 조각부에 등록하여 제롬의 강의를 받으며 소조 작품을
만들었고, 이미 살롱전에서 특선을 하여 조각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앙투완
부르델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고갱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마이욜은 학교교육과 더불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의 작품을 복제하는 등의
수업을 받았는데 이때 학교에서 배운 교육에 대해 실망하여 훗날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마이욜은 부르델과 페르낭 레제 등과 함께 공동 작업실에서 정물화를 그리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너무 살기가 어려워 공동시장에서 감자를 구입해다가
그것을 소재로 정물을 그리고 또한 그것을 주식으로 어렵게 생활한 나머지
나중에는 병에 걸려 병원에 눕게 되나 그 병원비도 없어 그냥 도망치듯이 나왔다.
1889년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전람회에서 고흐와 고갱, 베르나르 등을 만났으며
마이욜은 특히 고갱의 그림에서 큰 감명을 받았는데, "고갱의 그림은 나에게
하나의 혁명이며 퐁타방(Pont-Avant)의 그림 앞에서 나는 이 사상으로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당시 프랑스의 예술계는 살롱전을 주관하는 전통주의적이고 고전주의적인
예술가 그룹과 인상주의 등의 혁신적인 성향의 예술가 그룹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고,
마이욜은 인상파 등의 혁신적인 예술 경향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갱의 원근법을 무시한 새로운 화풍에 영향을 받은 마이욜은 1886년 고향
바뉠루스로 돌아가 이곳에서 일련의 태피스트리들을 제작한다.
그의 타피스트리들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는 15세기 이후 화가들이 고수해온 앞에 있는 것일수록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는 원근화법을 무시한 혁명적인 시도였다.
회화란 평면이란 2차원의 세계에 입체라는 3차원의 세계를 옮겨오는 방식이며
화가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해왔고, 그 해결책으로 찾아낸 것이
원근법이었다.
원근법의 붕괴는 기존 질서(앙시엥 레짐)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함게 구 체제의 패트런들로부터 해방된 예술가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해 왔던 역사, 종교, 신화 등 지금까지 전통적인 미술 작품의
주제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삶과 경험의 일부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잘 표현한 화가가 바로 프란시스 고야였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것, 자신이 보고자 했던 것을 보았고, 그 특정 국면을
과장하여 표현해냈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근대 미술을 여는 출발점이 된 것이었다.
1904년에 이르러 파리에서는 폴 세잔(Paul Cezanne)의 대규모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세잔느의 작품 뿐만 아니라 고흐와 고갱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었는데
세잔의 작품은 물론 고갱이나 고흐의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화풍은 미술의 본질적인
원천에 시선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그동안 박물관에 전시되어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원시 조각들과 다른 작품들이
새로운 예술로 각광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고갱은 <자유 예술의 시험>이라는 잡지를 통해 마이욜의 태피스트리 작품들을
칭찬했고, 마이욜은 작업에 더욱 정진하게 된다. 그러나 마이욜에게 예상치 못한
실명의 위기가 닥치고 만다. 그는 결국 태피스트리 작업을 중단하고 만다.
그의 나이 35세 때(1895)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태피스트리에서 소재를 따와
목조각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각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는데, 브랑쿠시가 맹인을 위한
조각이란 이름으로 포가니양의 조각을 한 것처럼 마이욜은 실명의 위기 속에서도
조각을 통해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시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미술 감상의 특성상 회화의 감상은 불가능하겠지만
맹인들에게도 조각의 감상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조각은 손으로 만져보며
감상해야 참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욜은 이듬해 클로틸드(Clotilde)와 결혼하여 아들 루시안(Lucien)을 얻었고,
자신이 제작한 태피스트리 <정원>을 프랑스미술협회에 출품했다.
이곳에서 마이욜은 피카소를 만났고, 그를 만난 것을 계기로 자신의 테라코타와
도자기를 '나비(Les Navis)파 그룹'에 선보이게 되었다.
마이욜이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어
그의 나이가 거의 40세 가까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이전에는 계속 회화만 고집하면서 계속 회화작업을 고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였으나, 오귀스트 로댕의 전시회에서 나체 조각을 직접 본 순간
그동안 갈피를 못잡았던 그의 마이욜의 작업에 일대의 전환점을 주었다.
그로부터 마이욜은 거의 대부분의 조각을 누드 여인상으로 제작했고,
누드를 통해 형태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였다.
비구상 조각들이 보편화된 현대에는 그 차이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조각은 회화나 드로잉, 판화에서 다루는 인체의 묘사가 옷 입은 모습을 주로 다룬데
비해 오래전부터 인간의 나신(裸身)을 묘사하는 특징을 보여 왔다.
고야가 '옷 벗은 마야'와 '옷 입은 마야'와 같이 누드로 여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
회화가 일정한 금기에 시달린데 비해서 조각에서의 누드는 훨씬 더 자유로운 표현을
허락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창작 욕구를 만족시켜줄 형태를 찾아 3차원의 세계(현실 세계)를 탐구한
도전자(조각가)들은 곧잘 인간의 아름다운 나체에 매료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고 구체화시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인간의 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마이욜은 때로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1898년 나무에 부조 형식으로 제작한 <원천>이 그렇다.
마이욜은 여성의 신체를 통해서 작은 소우주를 재현하고자 했는데,
그의 소우주는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였다.
1900년부터 마이욜은 본격적으로 테라코타와 브론즈 작품을 제작했고,
마티스가 주물을 도와준 <웅크린 여인>은 나중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중해>로 불리게 되었다.
마이욜은 1902년 최초의 개인전을 열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전시했는데 이때는 태피스트리, 목조, 철조,
석고 조각, 브론즈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 33점이 전시되었다.
특히 <지중해>는 야수파의 주목을 받으며 앙드레 지드는 이 작품을 일컬어
조각의 부활이라고까지 찬미했다.
이 무렵 로댕의 소개로 여러 후원자들을 만나면서 마이욜은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을 수 있게 되었고, 1908년에는 독일의 미술품 수집가 케슬러(H.C.Kessler)와
함께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마이욜과 함께 이 시기에 활동한 조각가이자 스승이었던 오귀스트 로댕과 같은
동료이자 제자였던 앙트완 부르델의 공통점은 조각에서 종교(기독교)의 영향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는 스승인 오귀스트 로댕이 당시 기성적인 예술 정신이었던 고전주의적인 기법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작가의지와 정열을 예리한 사실적 기법으로 표현하여
인간의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약동하는 생명력과 함께 리얼리즘에서의
인상주의적인 기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이욜은 로마 시대 이후 종교적 테마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첫 번째 조각가로 기록된다.
그는 신을 통해 자신이 바라던 것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예술은 발명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예술의 창조작업이다"라고 하여
최초로 현대 조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마이욜은 그런 엄청난 영향력에서 이탈한 조각가였으며, 그후 많은 현대 조각가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 다. 1944년 그는 자동차 사고로 임종을 앞두고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형태의 조화, 그 건축적 균형에 마음을 쏟는 것에 의해 인체의 지고한 미를
발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위대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표현하는 여성은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여인이나 신화 혹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에게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드 마이욜은 오귀스트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앙투완 부르델에서 브랑쿠시와
헨리 무어에 이르는 현대 조각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조각가였다.
마이욜은 로댕의 격정을 적절한 절제와 감성으로 제어했고, 무엇보다 그는 종교와
문학 그리고 사회의 여러 권위에 볼모로 잡혀 있던 조각을 해방시켰다.
또한 그는 그의 스승이었던 오귀스트 로댕의 빛과 그늘에 의한 매스(Mass-덩어리)적인
살붙임을 이어 받았으나, 나중에는 이를 극복하고 지중해성의 매끄러운
매스(덩어리)와 볼륨에 의한 조각적인 덩어리를 새롭게 보여 주었다.
그는 지중해라는 자연을 가까이 하며 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연관과
다원주의를 받아들여 그의 작품들은 초기 그리스 조각들의 소박함과 역동성을
닮아 있으며, 그 안에서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발견한
조각가였다.
그리고 아리스티드 마이욜은 <지중해>를
비롯하여 <일 드 프랑스>, <강>, <대기>, <밤>,
<플로라> 등의 작품에서 작품 제작에 있어서의 주제를 자연과의 대립이 아닌
자연과 융합하면서 그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즉 생명에 넘친 포름과 볼륨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의 윤택함과 풍요로움을 적극 포용한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는 또한 로마시대 이후 종교적(그리스도교) 테마로서의
성서적인 주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첫번쨰의 근대
조각가가 아닌가 한다.
프랑스 대표적 문호인 앙드레 지드는
마이욜의 작품들을 둘러보고는
“이것은아름답다.
이는 우미함을 표현하려는 것보다는 과묵한 작품이다. 생각컨데 미의 소박한
표현과는 거리가 먼 여러가지 선입관을 이정도로 말살한 예를 찾아보기 위하여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표면과 선의 단순한 아름다움, 거기에는
무엇하나 불필요한 디테일이나 군더더기가 없다. 그 고귀한 형태는 그대로 알카익하다.
그것은 극히 이상화되어 있는데 종종 이용되고 있는 정신화에서의 이상화가 아니라
단순화라는 의미에서의 이상화이다.”라 하여
그의 작업정신에 있어서 단순한 포름과 조각적인 매스라는 자체에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지중해(Mediterrane), 대리석, 110x120cm, Orsay미술관,
1902-1905년
'예술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진가 임응식 (0) | 2006.03.30 |
---|---|
요르그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 (0) | 2005.12.18 |
건축가 안도 다다오 (0) | 2005.11.13 |
조각가 권진규 (0) | 2005.08.21 |
까미유끌로델 (0) | 2005.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