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의 얼굴 1967,
테라코타 48.5×34.9×29cm
미술사에서는 작품보다 작가의 생애에 의해 작품이 재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평범하지 않은 작가의 삶을 통해서 또 다른 예술의 차원을 경험하게
되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권 진규(權鎭圭, 1922-73)가 1973년 51세의 나이로 작업실에서 목매어 자살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들은 말하기를 그가 미술계란 제도권에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겉돌면서
당시 조각계의 조류와 무관한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수립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자못 내향적이었던 한 조각가를 끝내 수용 하지 못하고 겉돌게 한
무언의 사회적 현상은 무엇이었을까?
죽기 전에 서울대의 박혜일(朴惠一) 교수에게 그는 마지막 편지를 띄웠다.
"감사합니다. 최후에 만난 우인들 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분이었습니다.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오후 6시 거사"라는 하직 인사였다.
독신이었던 그는 쓸쓸하고 조촐한 장례식을 치루었는데 장례비로 5백원 지폐뭉치
몇 장을 탁상 밑에 넣어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나칠 정도로 가난함을 안고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함흥 태생의 그는 꽤 부유한 환경 속에서 두 명의 누나와 한명의 형 그리고 두 명의
여동생이 있는 6남매 중 4번째로 자라났다. 어릴 적에는 실패에 사슴조각을 하기도 하고
연과 얼레를 만드는 비상한 손재주를 보여 주위로부터 칭찬을 곧잘 받기도 하였다.
중학교를 졸업 하고 미술공부를 만류하는 가족들 몰래 부산에서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의과공부를 하고 있던 형과 함께 기거하면서
사설 아틀리에에서 조형의 기초수업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징용을 피해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였다가 1947년에 재차 도일하게 된다.
도일하여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조각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 해에 동경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형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혈육의 죽음은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세계에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심화시켰다.
재학시절 같은 학교에서 만난 도모꼬는 이후 권진규에게는
유일한 여인상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의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도모꼬 집안은 완고하여 한국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권진규가 일본에 귀화하거나 한일국교가 좀더 빨랐더라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영위되었을 거라고 한다.
1947년에 도일한 권진규는 약 13년후 도모꼬의 귀화 제의를 뿌리치고 1959년에 귀국하게 된다.
그가 한국에서 작업을 한 시기는 1959년부터 1973년까지 약 14년동안이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테라코타(Terra Cotta)와 건칠(乾漆) 작품을 주로 제작하여 3회의 개인전을
가지게 되는데 그 중 두 번째는 일본에서 전시회를 가져 매우 좋은 호응과 여러 가지
호의적인 제의를 받기도 하였다.
귀국하기 얼마 전부터 시작한 테라코타 작업은 권진규 작업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
또한 그의 견실한 서구의 조각기법을 바탕으로 고대 동양의 마상, 한국의 옛 분묘
부위에 서 있 는 동물조상, 원시적인 포름(form)속에서 정신적인 공감을 갖고
그 자신의 내면의 공간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1965년 자소상, 초상조각, 마상, 부조, 여인나부상 등 일련의 테라코타 작품을 가지고
당시 한국 조각계에서는 보기 드문 조각 개인전을 서울 신문회관에서 가졌다.
그러나 당시 한국 조각계는 왕성한 추상조각의 실험과 새로운 재료의 수용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로서 권진규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고답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조형세계라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그의 격조 높은 참신한 구상과
현대조각에 망각되었던 재료 테라코타의 재질감은 독보적인 양식으로 국내 미술계에 알려졌다.
2회 개인전은 국내에서 준비한 30여점의 작품으로 1968년 동경 니혼바 시(日本 )화랑에서
가지게 된다. 당시를 회고한 권옥연은 이 때가 권진규 생애 최고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권진규는 여러 언론에서 호평을 받았고 화랑에서 후원하겠다는
제의와 그가 다녔던 무사시노미술학교에 교수로 와달라는 초청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예술보다 조국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모든 요청을 뿌리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세 번째의 개인전은 명동화랑의 6개월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 때의 평은
처음보다는 새롭게 부각되었지만 시대착오적이고 복고주의자라는 평은 여전히
그의 주위에서 맴돌았다. 안정된 직장 하나 없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생활난에 헤매인
그는 스스로 부여한 작가적 사명감으로 자신을 소외의 경지에 몰고 가게 된다.
선천적인 고혈압과 신장병 등 신체적인 이상들은 그를 더욱 파멸의 나락으로 몰고 갔고,
끝내 그는 견디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조형 전반에 나타나는 주된 특징은
리얼리즘이다. 스승 시미즈다카시를 통해
로뎅의 내적 생명의 비젼을 배우고 부르델의 풍부한 구축성 그리고 마리노 마리니
(Marino Marini)와 지아코모 만추(Giacomo Manzu)의 평범한 모티브에서 독특한
형태감을 찾아내는 양감의 세계를 그는 터득하였던 듯 하다.
이러한 작품의 외형적 형식 아래 그가 끝내 놓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한 것은
'한국의 리얼리즘'의 정립이었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탐구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 조각 은 신라때 위대하였고, 고려때 정지했고, 조선때에 바로크(장식화)화 했습니다.
지금은 외국의 모방이며 사실(寫實)은 전혀 망각되어 학생이 불쌍하다"고 쓰고 있다.
이는 조각가이기보다 장인이기를 자처한 것에서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즉 옛 도공의 그것처럼 논리성보다는 경험을 많이 요구하는 테라코타와 건칠이라는
기법을 택하여 작품제작의 소소한 과정까지 예술로 승화시키는 정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귄진규를 근대작가로 분류한다. 그러나 정신적 뿌리마저 외국을 모방하고 있는
현실에서 권진규의 존재는 오히려 선두적이다.
비록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세상을 향해 끝까지 투쟁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내면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던 주체적인 사상은 우리가 현재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단순히 외형적인 기교와 기법에 국한되어 권진규를 판단하기 보다는
그의 작품 저변에 품고 있던 사상을 생각하는 것이 더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자세일 것이다.
- 박미화 평론 中 -
붉은 법의를 걸친 자소상(自塑像) 1973,
테라코타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대표작으로 내세우는 작품이다.
현대 조각에서 보는 자각상(自刻像)들이 대체로 즉물화적(卽物化的)인
경향을 띠고 있다면 이 작품은 양식적으로 확실히 근대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다.
서구적인 조각의 어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우리 자신의 문제 의식을
표현 한 것이다.
토르소의 수법을 쓰지 않으면서도 인체를 과감히 생략하여,어깨와 팔을 없애 버리고
목을 될 수 있는 한 길게 늘어뜨린 수법은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여지없이 깎아내는 일종의
조형감량법...
탈속의 냄새
사랑하는 아내와 다정한 연인의 머리카락을 미련없이
잘라내고, 건장해 보이는 사람들의
두 어깨를 여지없이 깎아낸다. 그리고 그들을 세속적 세계로부터 구제라도 하듯
삭발한 머리에는 스카프를, 깎아낸 두 어깨에는 붉은 승복을 걸치게 함으로써
영원의 세계에 사는 시민으로 미화시킨다.
그의 인물상들을 보면 생활의
냄새는 없고 도리어 생활을 피해 피안의 나라로
도망하는 듯한 초월자의 고독한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그가 자신의 <자소상> 한 점을 고려대 박물관에 양도하고, 몇 개월 후 아틀리에에서
목을 맨 것도 의미심장한 일. 그의 세속적 삶이나 육체는 더 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었지만, 그 <자소상>은 영원히 이 세상에 있고 싶었던 것,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의 무덤은 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에 미이라처럼 남아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 아틀리에 낙서 中
내가 권진규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건 대학을 졸업한 후로 기억된다
여태 껏 공부한 것이 거의 와국의 조각가들
(로뎅,부르델, 마이욜,브랑쿠지,쟈코메티 등등)이었으므로.....
우리 나라 조각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그때까지는 변변한 책도 없어
거의가 외국 서적의 해적판으로 (지금은 저작권법에 걸리겠지만)
공부를 할 때 였으니.
한국의 조각가로는 학교의 스승님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근대의 조각가로는 권진규 외에도 김 복진,윤효중)
이 분들의 작품은 이 후에 다시 검토 해볼 요량이다.
예술가의 재능과 천재성도 시대를 제대로 만났을때 아름답게 꽃 피워지는 것을...
좀 더 현실에 적응하고 영악하게 살았다면 훨씬 더 많은 좋은 작품과
개인적인 영달을 이루었을 터인데 너무나 고지식한 예술가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외면과 궁핍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 한 예술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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