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의 불교사적 위치를 짚어보면
초기의 부석사는 삼국사기에 전해 지듯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여 진다.
그때는 오늘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고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에
초가를 짓고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 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입구엔 단풍이 절정에 달해 가을 한가운데에 있음을 실감
가을색은 단연 빨강 노랑 초록이 함께 어울릴때인거 같다.
부석사
고려 이후의 부석사는 구 한말 민속학자인 이 능화 선생의 화엄 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화엄종의 본찰임을 알수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이 돌은 실제로 떠 있어 실을 가로 질러 넣어보면 떠 있을 알 수 있다고.
그래서 절이름도 부석사라 함
조선 시대에는 여러 선객들의 수도처로 유명했고 영조때 화재로 소실 된 승당,만원당,서별실 ,
만세루,범종각등을 중수하고 단청도 다시 하였으며 무량수전의 금색도 다시 했다.
한적한 10월 한낮의 부석사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천등산 봉정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