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서원으로 1650년(효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鄭夢周) 제향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하였다가 위패를 옮겨 오게 되었다.
설립과 동시에 '심곡'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양팽손(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손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 제향과 지방교육의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일조당(日照堂)·재실(齋室)· 장판각(藏板閣)·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가 봉인되어 있으며,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일조당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합각(合閣)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목판벽(木板壁)으로 각 칸마다 판자문비(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반칸의 합각 홀처마로 된 재실은 원생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맞배지붕에 홀처마로 된 장판각에는 67종 486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5년에 도난을 당하여 현재는 《정암집 靜庵集》· 조선사 朝鮮史》등만 남아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이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내에 있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경기도 보호수로 되어 있다. |
심곡서원 정문

심곡서원 현판

일조당

장서각

사당입구 중문
테라스에서 내려 다 본 심곡서원.
며칠 비가 내리다 볕이 좋으니 이웃에서 서원 앞 마당에
빨간 고추를 널어서 말리고 있다.
추가로 조광조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학자였다.
그는 1515년 성균관유생 2백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의 옥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 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서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할 목적으로 인재를 천거,
시험에 의하여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 二倫行實>과 <언해여씨향약 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이 같은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그의 이상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타인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어 정적이 생기고,또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하여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 이행 등의 사장파와 서로 대립하게 되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그들의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세력을 소인시함으로써 훈구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 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이 1519년에 있었던
반정공신(反正功臣)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건의한 결과,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를 삭탈하고그들의 과분한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이용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 (走肖爲王 :走肖는 趙의 波子)'
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 김전, 남곤,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년 11월 홍경주로 하여금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 주도록 상계를 올렸다.
이때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이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조광조 일파가 투옥되자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이들을 당장에
처벌하게 하려 했으나 이장곤(李長坤), 안당, 정광필 등은 이에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인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밖에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홍언필(洪彦弼),
이자(李자), 유인숙(柳仁淑) 등 수십명은 귀양가게 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惟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왕비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을
먼 원인으로 하고,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하여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등이
삭훈사건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여 폭발된 것이다.
이 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지금도 서원 맞은편 언덕위에는 조 광조의 묘가 그 옛날의
영화와 권세를 말해 주는 듯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