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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방

창의문으로의 봄 나들이

by 마이욜 2007. 4. 17.

서울 성곽엔 동서 남북에 사대문,그 사이에 서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적이 없었고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명으로 불려 왔다.

 

태종때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 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자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 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영조 17년 이곳을 수축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이 산은 40년 가까이 민간인이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1968년 1.21 사태 때 북한의 무장 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는 목적으로 이 산까지

침투했던 사건 이후부터였다.

 

 

1.21사태 때 공비들과 군경 수비대 사이의 교전 중 남았다는 15개의 탄흔을 흰색 페인트로

점점이 칠해 놓은 소나무 한 그루.  

 

 

 

이 곳 북악산 성곽을 다시금 개방해 볼 수 있게 되어 하루 1000여명의 등산객들이 구경을 온다.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고 남산과 대칭하여 북쪽에 있다 하여 북악이라고 한다.

모습이 탐스럽고 날씬하여 "죽순같이 솟아 오른 산" 또는 "벌어지기 직전의 모란꽃 봉오리"로 비유

되며 북악산 정상에서는 잘 보존된 자연 환경과 고풍스러운 멋을 내는 서울 성곽과 북한산의 봉우리

서울 시내 전체를 조망할수 있어 현대의 서울과 조선의 서울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창의문 밖 지형은 지네처럼 생겼다하여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 위에 봉황 한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 한다.

  

  

서울 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태조때 수축하기 시작 해 세종때 대대적으로 보수 확장

하였다가 숙종 때 재 정비하였는데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 성곽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으며,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전란으로 인한 피해는 입지 않았다.

 

 

옛 사람들의 돌을 쌓은 모양새가 너무나 멋있다.

 

 

공사 실명제가 있어 나중에 성벽이 허물어지면 공사 책임자가 보수를 하였다 한다.

 

 

 

성벽의 축조 방식으로 시대를 알 수 있다.

 

 

 

이 곳은 아직 목련이 한창인데 우리가 흔히 보는 목련은 일본 것이고 아래 사진의 꽃 송이가 작고

은은한 목련이 순우리  것.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숙정문.

원래는 문루가 없이 월단(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된 것이다.

 

 

 

 

근총안으로 내다 보니 멀리 삼청각이 보인다. 

 

서울 성곽을 보며 오른 북악산은 창의문을 거쳐 백악마루,일제 강점기에 쇠말뚝을 박았던

촛대 바위를 지나 숙정문 그리고 말바위 쉼터로 해서 두시간 반의 일정으로 다 내려와선

감사원 앞길의 삼청동길도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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