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방

다산에 대하여!

마이욜 2005. 6. 24. 18:09

 

다산과 그의 중형(仲兄) 정약전은 세상에서 소문난 형제지기(兄弟知己)였습니다. 같은 취향의 실학자인데다, 비슷한 수준의 학자, 동등한 진보적 논리의 소유자이자 동포(同胞)형제라는 혈육을 같이 한 피붙이였습니다. 네 살 차이로 나이가 다를 뿐, 같은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하고, 같이 불행한 때를 만나 감옥에 갇히고 유배살이를 해야 하는 아픔까지도 함께 겪었던 처지였습니다.

정약전의 나이 51세, 다산의 나이 47세이던 겨울에 5년에 걸쳐 다섯 차례나 수정보완했던 『주역심전(周易心箋)』이라는 주역연구서 24권의 대저(大著)를 완성했습니다. 책이 완성되자 저 먼 바닷 속의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중형에게 원고를 보내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자 당대의 주역학자 정약전은 기쁨에 넘쳐 서문을 지었습니다.

“내가 약용으로 아우를 삼은 지가 44년이나 되었다. 약용은 젊어서는 성균관에서 노닐며 과문(科文) 짓는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자 나는 그를 훨훨 나는 재사(才士)라고 여겼다. 장년에 이르러서는 홍문관이나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문학(文學)으로 밝은 임금(정조)을 섬기기에 나는 그를 문장과 경술(經術)의 선비로 여겼다. 밖으로 나가 정치를 하면서는 크고 작은 일이나 안과 밖의 일에 모두 그 지극함에 도달하기에 나는 그를 정승의 지위에 오를 그릇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뒤늦게 바닷가로 귀양 와서 『주역심전』을 저작하였기에, 나는 처음에는 괴상하다고 여겼으나 중간에는 희열을 느낄 정도였고 마침내는 깨닫지 못한 사이에 저절로 무릎이 굽히며 약용이 어떤 등급의 인간인가를 모를 지경이었다.…” (『사암연보(俟庵年譜)』)

형이 아우의 학술서적에 서문으로 쓴 글이 이렇게 멋질 수 있을까요. 그만한 학문 수준에 이른 형이었기에 아우를 그처럼 넉넉하게 칭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재사에서, 문장경술의 선비, 국정을 모두 제대로 처리하는 정치인으로, 뛰어난 학술서적의 저자로 높이 올린 형의 글은 아우를 위한 참으로 정당한 평가였습니다.

 

 다산 연구소의 박 석무씨가 올린 글 입니다.

 

 다산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수록 너무나 멋진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형만한 아우없다더니 다산의 형 약전 역시 큰 그릇임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