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과 북촌 둘러보기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멎고 나서 들어선 운현궁 마당은 얼마나 정갈하고 좋은지!
담장 또한 여러 가지 모양의 무늬로 아름답고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수있게
별도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ㅁ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년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지었는데 정면이 8칸.측면이 7칸이다.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6칸,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흥선 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그대로 남아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측면 3칸 규모이다.1866년(고종3년) 삼간택이끝난 후 명성왕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운현궁 마당에 심어져 있는 호두나무
운현궁을 벗어나 북촌으로 가는 길에 철쭉, 연산홍이 한창이다.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창덕궁의 측면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북촌 1경
지금은 안동 손 칼국수집이 여운형의 집 터
중앙고등학교 가는 길에 있는 우물터
중앙고 정문에서 남쪽으로 50미터가량 내려오면 왼쪽에 우물이 있다.
계동 25-1일대이다.우물이 돌로 되어 있어 이 동네를 석정골이라고 불리웠다.이 우물물이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들 했다고 한다. 외국인 최초의 선교사였던 중국인 주문모신부가
1794년 12월 17일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들어와 이 동네 신도(역관 최인길 마티아)집과 여신도 회장이었던
순교자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숨어 성사지행을 하며 선교활동을 벌일 당시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고 마시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석정골 보름 우물터 앞이 계동 58번지이다.여기에 3·1 독립운동 기념터 유심사(惟心社)가 있었다.
이 유심출판사는 한용운 선생이 3·1독립정신을 중앙중학교 학생들에게 심어 주었던곳이다.
이곳은 30평 남짓한 초라한 한옥집으로 되어 있다.
같은 설계자가 건축을 해서인지 고려대학교와 똑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이 해 박는집)
가운데 보이는 집이 한화그룹 회장댁 (명당의 기운을 받은 까닭?)
현직 대통령이 살던 집
북촌 5경인 골목길.
처마를 서로 맞대고 늘어선 한옥들 자태가 빼어난다.북촌 골목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정독 도서관(옛 경기고교 자리)내에 있는 종친부
종친부는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정독도서관 정문에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인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을 지낸 분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王家)·종실(宗室)·제군(諸君)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경근당과 옥첩당의 의젓한 모습
지금의 덕성여고 내에 있는 감고당 터 (인현왕후의 친정집)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폐비가 되어 살던 집 '감고당'
지금의 풍문여고 내에 있는 안동 별궁 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가례처로 건립된 별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