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을 꼼꼼히 다시보네!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26년)부터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주었다.
전성기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으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대한문 앞에 다다르니 마침 수문 교대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이고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인데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중화전은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궁궐의 으뜸 전각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재건하면서 당시의 어지러운 시국과 궁핍한 재정 상황으로 인해
중층이었던 것이 단층으로 축소되어 건립되었다.
왼쪽이 준명당, 오른쪽이 즉조당
석어당은 덕수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층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년간 감금 생활을 했던 곳으로 광해군이 왕 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 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즉조당 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 곳이다.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있다.
준명당은 황제가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 되었다.
명이라는 한자에 눈 目자가 들어간 것은 업무를 더 잘 보라는 뜻이란다.
1897년에 건립된 왕의 침전으로 고종은 이곳에서 기거하다가 68세를 일기로 승하하셨다.
1897년 함녕전의 대청마루에 전화기가 설치되자 고종은 필요할 때마다 전화기로 대신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전화를 "대청전화"라고 했는데 그 덕분에 김구가 사형직전에 목숨을 건진 일화가 "백범일지"에 실려있다.
고종이 김구의 사령집행 서류를 검토 중 형 집행 직전에 전화로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려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함녕전 뒤편의 전벽돌로 만든 유현문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
산수유 나무가 만개한 4월의 고궁
환구단은 현 서울광장 너머에 있었던 남별궁터(현 조선호텔 자리)에 건축되었는데 1897년 고종이 황위에
오름을 하늘에 고하기 위한 곳인데 1914년 조선철도 호텔 건설 때 파괴되었으나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와
돌북이 남아 대한제국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나비 모양의 돌쩌귀